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난민 인정률 1%의 벽을 뚫지 못한 6명의 이야기

어려울 난(難), 백성 민(民).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난민이다. 특히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적 차이나 사상적 차이를 이유로 고국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피할 곳을 찾아 고국을 떠난다. 세계 각 나라는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제도만 보면, 한국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나라다. 한국은 1992년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 협약’에 가입했다. 2012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다. 현실을 보면, 한국은 난민을 매우 배척하는 나라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1년간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1.3%에 머물렀다. G20에서 유럽연합을 제외한 19개 회원국 중 18번째로 난민 인정률이 낮다.

[2021년 난민 심사]
난민 심사완료 건수: 7,109
난민 심사완료 대비 인정 건수: 72
난민 인정율: 1.0%

난민에게 온전한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정부는 7,109건의 난민 심사를 완료했다. 이 가운데 약 1%인 72명만 난민으로 인정됐다. 약 2%인 154명은 ‘인도적 체류’ 자격을 얻었다. 나머지 6,992건은 ‘난민 불인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국을 찾아온 난민은 그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른 나라보다 유독 한국의 벽이 높은 이유도 알지 못한다. 목숨까지 위협받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얼마나 어떻게 입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심사관 개인의 임의적 잣대에 의해 난민 인정 여부가 결정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여기, 난민이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있다. 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시리아, 예멘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떠나온 6개 나라는 199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서 난민 지위 또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이들 모두 G-1 비자를 갖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들에게 부여한 G-1 비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선 난민 심사를 신청하면 G-1-5 비자를 받는다. 난민신청자 신분이다. 이들은 언제 한국에서 쫓겨날지 전전긍긍한다.

난민 심사 결과,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를 현저히 침해당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판명되면, ‘인도적 체류 허가’에 해당하는 G-1-6 비자를 받는다. 그런데 이는 난민 인정과 다르다. 난민 인정자는 안정적으로 한국에 머물 수 있지만,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3~12개월 단위로 체류 자격을 계속 갱신해야 한다. 그때마다 체류 연장이 될지 아닐지 알 수 없다.

G-1 비자를 지닌 이들은 한국에서 먹고 살 방법이 마땅치 않다. 난민 인정 신청일로부터 6개월 동안 취업이 불허되기 때문이다. 취업 제한이 풀려도 ‘단순 노무 업종’에서만 일할 수 있다.

<단비뉴스>는 6명의 난민신청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내는가. 앞으로 어찌 살 것인가.
그러자 그들이 되물었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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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시리아 예멘
수 민 우
군부 독재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시위 현장에 뛰어들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잃어도 좋다는 결심이었다. 탄압은 거세졌고, 수는 어린 딸의 위험이 걱정돼 미얀마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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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 티기스트 타디시
부족 간 분쟁은 삶의 터전을 빼앗아 갔다. 집권 부족이 휘두르는 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쳤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에티오피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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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사프루 마르마
방글라데시 정부는 오랫동안 줌머인을 탄압했다. 줌머인인 아웅사는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 기소당했다. 이후 정글과 숲속을 전전하다, 방글라데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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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무스타파
이집트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다 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 민주주의를 찾아 한국까지 왔다. 이집트를 떠나온 지 5년이 됐지만, 아직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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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아흐메드 바탈
2011년 평화로운 고향 알레포에 총성이 울렸다. 19세 소년 하산에게도 징집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하산은 차마 자신의 지인을 향해 총을 들 수 없었다. 결국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어 가까스로 한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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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도에 유학을 갔다. 유학 중 예멘의 내전이 심화됐다. 고국에 돌아가면 징집되어 내전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예멘 사람을 받아주는 나라를 찾아 세계를 떠돌고 있다. 마지막 희망을 한국에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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