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하라(Amhara). 32년간 아스퍼 티기스트 타디시(Asfaw Tigist Tadesse·35)의 정체성을 규정해온 단어다. 암하라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부족 중 하나다. 80여 개가 넘는 부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에티오피아에는 내전이 끊이질 않는다.
현 집권 부족인 오로모(Oromo)족은 암하라 부족과 오랜 기간 적대적 관계였다. 권력을 잡은 후에는 노골적으로 암하라인들을 배척하고 탄압했다.
티기스트와 그 가족도 이들의 횡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티기스트의 남동생은 오로모족을 피해 거주하던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삼촌은 운영하던 가게를 잃었고 티기스트는 살고 있던 집을 잃었다.
늦은 밤,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티기스트는 기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데 한 무리의 남성들이 다가왔다. 오로모 언어를 쓰던 그들은 티기스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에티오피아 신분증에는 출신 부족이 적혀있다. 남성들은 신분증에 적힌 ‘암하라’를 확인하자 티기스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간했다.
이후 티기스트는 밤늦게 퇴근하는 날마다 불안에 떨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사방에 오로모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말하기도 꺼려졌다. 오직 큰언니에게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티기스트는 2019년 7월 처음 한국에 왔다. 당시 근무하던 굴착기 제조회사에서 기술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보냈다. 일주일간의 업무를 마치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티기스트는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출장이 끝나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는 특정 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공포에 떨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를 떠나올 때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챙겼다. 한국에 머물려는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경과 전통의상, 그리고 평상복 몇 벌만 들고 왔다. 티기스트는 에티오피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한국에 왔다. 여동생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첫날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은 덥고 습한 날씨였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다. 짧은 우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온난한 날씨가 지속된다. 티기스트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던 서울의 야경이다. 가족과 집, 모든 것을 버리고 도착한 도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하루빨리 정착해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티기스트는 생각했다.
출장 일정이 끝나자, 티기스트는 난민 지원 단체인 ‘피난처’를 찾아갔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체류 만료 기간을 며칠 남겨둔 2020년 7월,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