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민 우
미얀마
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

교사 수 민 우(Su Myint Oo·38)는 미얀마의 항구 도시 탄린에서 태어났다. 강 건너편에는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양곤으로 간 수는 사회와 영어를 가르치는 사립중학교 선생님이 됐다. 수는 학생들을 사랑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

2020년, 미얀마 국민의 자유 투표로 민족민주동행회(NLD)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듬해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자유 선거에 의해 선출된 윈 민 대통령과 아웅산 수찌 국가 고문을 가택 연금했다.

수의 평화롭던 일상도 빠르게 무너졌다. 미얀마에서 교사의 정치적 언행은 금지된다. 그러나 수는 견딜 수 없었다. 수는 “사립학교 교사지만 군사독재자의 밑에서 교육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얀마 국민은 감금돼있는 지도자들을 석방하라는 평화 시위를 열었다. 수도 가담했다. 처음엔 망설였다. 수의 아버지는 만류했다. “하나뿐인 4살짜리 어린 딸을 두고 나가면 어떡하느냐”고 붙잡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수는 죄책감을 느꼈다. 시위 시작 일주일 만에 수는 거리에 나섰다.

평화 시위였음에도 군부는 잔인하게 억압했다. 이에 대항해 시민불복종운동이 시작됐다. 2021년 4월 미얀마 민주 진영의 임시정부인 국민통합정부가 구성됐고, 무장조직인 시민방위군도 결성됐다. 군부는 시민불복종운동에 가담한 마을을 불태우고, 시민방위군을 잡아 살해했다. 학교와 아이들까지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됐다.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수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딸의 안전이 걱정됐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죽거나 연락이 끊겼다. 제자였던 19살 학생은 시민방위군에 가담했다가 사망했다. 같이 시위했던 친구는 체포돼 소식이 끊겼다.

군부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하자, 수는 시내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집 근처 길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동네에 살던 누군가가 시위하는 수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가 수를 군부 측에 신고했다. 체포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

수의 ‘이주’가 시작됐다. 위협을 느낀 수는 양곤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떨어진 포 바(Pho Ba)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 바닷가로 떠났다. 양곤으로 다시 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닷가 마을에서 무작정 숨어있을 수도 없었다.

수는 5살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피신하기로 결심했다. 한국에는 몇 년 전부터 돈을 버는 남편이 있었다. 수가 생각하기에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이자 인권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나라였다.

집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던 지난 4월 26일을 떠올리면 수의 가슴은 지금도 서늘해진다. 공항까지 가는 길에 군인들에게 두 차례 검문당했다. 다리 위에서 처음 검문당했다. 군인들은 시민방위군을 후원하러 가는 거냐고 캐물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보러 가려는 것”이라고 수는 답했다. 공항 앞에서 두 번째 검문을 받았다. 군인들은 공항에 들어가는 모든 차를 멈춰 세워 어딜 가는 거냐고 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았다. 그날은 시간이 늦어 공항에 있는 쉼터에 머물러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담당자가 왔고 코로나 검진을 받았다. 딸에게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코로나 치료센터에 7일 머물렀고 다시 공항으로 갔다. 조사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한국에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난 5월 10일, 석 달의 체류 자격을 받았다.

남편의 집이 있는 인천으로 향했다. 남편은 9년 전인 2013년 돈을 벌러 한국에 왔다. 페인트칠을 해서 번 돈을 미얀마의 가족에게 보냈다. 오랫동안 고생한 남편은 지난 4월 미얀마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가 상황을 뒤바꿨다. 미얀마로 돌아가려던 남편은 한국에 남았고, 오히려 아내인 수가 한국으로 피신하게 됐다.

미얀마
Yangon
한국
Incheon
비자

방문 비자 3개월. 수가 공항에서 며칠간의 조사 끝에 획득한 비자다.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다른 비자를 받지 않으면 석달 안에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수는 인천출입국·외국인청으로 가서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그곳의 직원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미얀마 말을 하는 이가 그곳에는 없었다. 다행히 난민 신청을 하러 온 다른 미얀마 사람이 한국어를 할 줄 알았고, 대신 통역을 해줬다.

수의 첫 난민 심사 인터뷰는 간단하게 끝났다. 보통 2시간 넘게 걸린다고 들었지만, 딸과 함께 들어간 수의 심사는 20분간 진행됐다.

수는 난민신청자에게 부여되는 G-1-5 비자를 받았다. 오는 12월 10일까지 체류할 수 있는 6개월짜리 비자다. 그날이 오기 전에 다시 비자를 연장해야 하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다.

난민 인정 심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알 수 없다. 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을 사진과 문서를 제출하지 못한 것이 수의 마음에 걸린다. 군인들에게 체포될까 두려워, 시위에 참여했을 때 찍은 사진을 모두 없애버렸다. 탈출하려고 사진을 지웠지만, 탈출에 완전히 성공하려면 그 사진이 필요하다.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비자를 연장받을 수 있다고 해도 걱정이 많다. 3~12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이 비자로는 단순노무직을 제외한 직업을 갖기 어렵다.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미얀마가 안정되어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 수는 한국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G-1-5 비자가 아니라 F-2 비자가 절실하다. F-2는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에게 부여되는 비자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의 난민 인정률 1%의 벽을 뚫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비자다.

난민 인정을 받는다 해도 한국에 영원히 살 생각은 없다. 고국 미얀마가 수에겐 소중하다. 다시 평화를 찾는다면, 언제든 미얀마로 돌아갈 것이다. “평화로워진 미얀마에서 남편, 딸과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에요.” 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

몸은 한국에 있어도 수의 머릿속은 미얀마의 민주화로 가득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의 가족은 한국에서 열리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 시민방위군과 시민불복종운동 단체에 대한 후원도 이어가고 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매달 30만~40만 원을 후원금으로 낸다. 남편 소득 330만 원의 10%에 이르는 큰돈이다.

후원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생활비로 쓴다. 어린 딸의 유치원비 53만 원이 고정적으로 나간다. 그 밖에도 생활비, 음식, 건강 관련 비용으로 지출되는 돈이 많다. 다행히 집 걱정은 덜었다. 남편이 일하는 직장에서 작은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도 수는 모든 것을 아껴 쓰고 있다. G-1-5 비자를 받은 수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미얀마에서는 선생님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수는 매우 아쉽다.

한국어가 서툰 수는 9월 7일부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딸을 돌본다. 딸은 아침 8시 30분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 3시 40분쯤 돌아온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은 걱정과 달리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다가올수록 수의 걱정은 커진다. G-1 비자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미얀마의 상황이 나아지기는 할지, 그게 언제쯤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딸을 위해서라도 수는 난민으로 인정받고 싶다.

팩트체크
난민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다? ‘거짓’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난민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다만 고국을 탈출하는 순간부터 경제적 곤궁에 처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난민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는 오래 굶주려 볼록 나온 배와 앙상한 팔다리에 머물러 있다.

2018년 제주에 입국한 예멘 국적의 난민신청자들이 ‘가짜 난민’으로 불린 이유도 이런 인식에서 기인한다. 스마트폰을 꺼내든 이들의 사진을 보고 ‘가난한 난민이 어떻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을 수 있냐’는 말이 나왔다. ‘난민다움’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이 여전히 강력한 것이다. 예맨에서 온 그들은 내전으로 인해 난민이 된 것이지 가난하고 못 배워 난민이 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기자, 부자, 인권단체 활동가, 펀드매니저, 교사 등 지식인 또는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이 정치적, 사상적 박해를 받아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단비뉴스>가 만난 6명의 난민신청자 중 5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회계사, 사업가 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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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시리아 예멘
수 민 우
군부 독재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시위 현장에 뛰어들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잃어도 좋다는 결심이었다. 탄압은 거세졌고, 수는 어린 딸의 위험이 걱정돼 미얀마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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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 티기스트 타디시
부족 간 분쟁은 삶의 터전을 빼앗아 갔다. 집권 부족이 휘두르는 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쳤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에티오피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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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정부는 오랫동안 줌머인을 탄압했다. 줌머인인 아웅사는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 기소당했다. 이후 정글과 숲속을 전전하다, 방글라데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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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도에 유학을 갔다. 유학 중 예멘의 내전이 심화됐다. 고국에 돌아가면 징집되어 내전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예멘 사람을 받아주는 나라를 찾아 세계를 떠돌고 있다. 마지막 희망을 한국에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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