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
예멘
죽음이 기다리는 고국을 떠나온 이스마일

고국을 떠나오기 전 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Alfarran Ismail Mohammed Ali·31)는 평범한 22살 청년이었다. 예멘의 수도 사나(Sanaa)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스마일은 고향에 있는 대학에서 정보통신(IT)을 전공했다. 회계사로 오래 일한 아버지에게서 회계 일도 배웠다.

대학 졸업을 앞둔 2014년 11월, 이스마일은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6개월간 영어 공부를 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대학 졸업장과 영어 구사 능력이 있으면 예멘으로 돌아와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이 영영 고국을 떠나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스마일이 인도에 머무는 동안 예멘의 내전이 격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인근 지역에서 일어나던 분쟁은 곧 예멘 전체를 덮쳤다. 이스마일의 고향 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같은 공중 폭격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다쳤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길가를 떠돌았다. 이스마일의 이웃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폭격을 당했다. 그 자리에서 부부와 아이 6명 모두 즉사했다.

인도에 올 때 예매해둔 귀국 비행기 표는 무용지물이 됐다. 고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걱정됐지만, 폭탄이 터지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자 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멘인을 받아주는 다른 나라를 찾아야 했다. 비자가 만료되기 이틀 전, 이스마일은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말레이시아에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3개월 만에 간신히 취업한 회사에서 이스마일은 회계사로 일했다. 하지만 월급이 턱없이 적었다. 2년 반 동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300~400달러의 월급으로는 집세와 식비 같은 기본적 생계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스마일은 한국을 택했다. 제주도라는 작은 섬에 가면, 비자 없는 예멘인을 받아준다고 했다.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8년 1월, 이스마일은 제주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어깨에 걸친 배낭 안에는 외투 두 개와 3,000달러, 관광객으로 보이기 위해 구매한 중고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그런 행색과 차림을 준비한 이유를 묻자, 이스마일은 “한국에 장기체류하러 왔다는 걸 알면 바로 쫓아낼까 두려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랬어도 공항 출입국 직원은 그를 멈춰 세웠다. 직원은 이스마일을 방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예멘
Sanaa
인도
Goa
말레이시아
Kulala Lumpur
한국
Incheon
“그들은 나를 마치 범죄자 대하듯이 했어요.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이스마일은 조사관의 질문에 침착하게 답변했다. 말레이시아행 출국 비행기 표까지 확인받고 나서야 2시간가량의 조사가 끝이 났다. 공항을 나와 처음 마주한 제주는 온통 하얗게 덮여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눈이었다. 곧 매서운 겨울바람이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뚫고 들어왔다.

비자

일단 제주 땅을 밟은 뒤, 이스마일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난민신청자에게 부여되는 G-1-5 비자로 약 1년간 생활했다. 두 번의 인터뷰 끝에 난민 인정은 거절당했고 인도적 체류 허가인 G-1-6 비자를 받았다.

난민심사관은 이스마일에게 “가족들이 예멘에 남아있으니 고국으로 돌아가도 위험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스마일은 “인터넷에 ‘예멘 내전’을 검색해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실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랬어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이스마일은 1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만 합법적으로 한국에 머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첫 직장은 지인이 소개해 준 경북 구미의 스티로폼 공장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을 맞이한 건 환대가 아닌 무시와 차별이었다. 공장 관리자는 툭하면 한국어로 욕을 뱉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네가 전쟁을 피해 온 건 내 알 바 아니야.”

길거리에서는 수없이 인종차별을 당했다.

이스마일은 곧 다른 일자리를 찾아 제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주어진 선택지는 고된 육체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뿐이었다. 이스마일은 만화책 제조공장과 배달 기사일 등을 전전했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대학 졸업장도 영어 능력도 더 나은 일자리를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스마일은 한국에서 공부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했다. 학교는 이스마일에게 G-1 비자가 아닌 유학생 비자를 요구했다. 난민 비자조차 받지 못하는 데 유학생 비자를 받을 방법은 없었다. “문을 두드릴 의욕이 더 남아있지 않다”고 이스마일은 말했다.

“G-1 비자는 가장 비인격적인 비자에요. 난민들에게 알아서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죠. 마치 개 한 마리를 풀어 놓듯이 말이에요”
한국

이스마일은 현재 전남 영암의 조선소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구한 네 번째 직장이다. 선박 본체를 만드는 공정 중 파이프를 옮기고 조립하는 업무를 맡았다. 작업장은 7층 높이에 있다.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며칠 전에는 같이 일하던 작업자가 추락해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무섭고 힘들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어요. 어렵게 구한 일자리를 쉽게 그만둘 수는 없죠”

영암에 오기 전 4개월간의 서울살이는 팍팍했다. 지인의 소개로 배달 기사 일을 구했지만, 서울의 물가는 이스마일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다. 이태원의 작은 옥탑방 한 칸이 이스마일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요리할 수 있는 가스레인지도, 세탁기도, 에어컨도 없었다. 단열이 허술해 여름에는 벽이 뜨겁게 달궈질 정도로 열기가 올랐다. 건물 계단은 너무 좁아 새 가구를 들고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

고국에 있는 가족과 가끔 통화한다. 그것만으로는 타지 생활의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는다. 형제들이 간간이 보내는 조카 사진을 볼 때면, 가족을 꾸려 미래를 계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고국에 있던 시절, 이스마일은 약혼했었다. 상대는 대학교에서 만난 여자친구였다. 예멘을 떠나온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예멘에서 가정을 꾸렸다.

“가족들을 한국에 데려올 수도 없고, 제가 예멘에 갈 수도 없습니다. 8년째 이렇게 떠돌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2017년에는 고국에 계신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도 건강이 안 좋으신데 다시는 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팩트체크
난민 수용하면 범죄율이 증가한다? ‘거짓’

2018년 제주도에 들어온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을 두고, 이들이 강간이나 강도, 테러 등 심각한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난민법·무사증 입국·난민 신청 허가를 폐지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려하던 것처럼 예멘인들이 성범죄를 포함한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보고는 지금까지 없다.

이민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연구소 ‘신미국경제’(New American Economy)의 자료를 보면, 2006년에서 2015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역 10곳 가운데 9곳에서 오히려 범죄율이 감소했다.

법적 지위가 불안정한 난민들은 정착하려는 국가의 법령을 충실히 따르는 경향이 있다. 범죄에 연루되면, 난민 인정이나 체류 기간 연장 등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미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라 해도 형사처벌 이후에는 난민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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