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아흐메드 바탈
시리아
내전 때문에 가족과 이별한 하산

하산 아흐메드 바탈(Hasan Ahmad Batal·25)의 고향인 알레포(Aleppo)에는 총소리와 전투기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산은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2011년 발발한 내전으로 더는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

시리아의 상황은 알 아사드 군부 정권의 독재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테러단체 등의 개입으로 악화했다. 내전이 심해지면서 19살 소년 하산에게 징집령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하산이 총구를 겨누는 대상이 친척이 될 수도 있었다.

내전은 평온했던 알레포와 그의 일상을 흔들어놓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섬유공장이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그의 집 위로 전투기가 지나갔고, 군인의 총격으로 방 유리창이 깨졌다. 반복해 울리는 총소리는 하산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정부군의 징집 통지를 받은 지 2개월 뒤, 하산은 쌍둥이 동생과 함께 한국행을 결정했다. 6개월 먼저 한국으로 피난한 형 살레가 한국이 안전하다고 연락해왔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 함께 피난을 갈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거동이 불편한 조부모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9살의 어린 여동생 또한 부모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하산은 죽음의 위협이 도처에 있는 고향을 떠나려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옆자리에는 쌍둥이 동생이 앉았다.

40일. 하산이 집을 떠나 한국 땅을 밟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하산은 삼촌이 사는 중국 상하이로 가기로 했다. 여권과 여벌 옷 세 벌이 든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났다. 우선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2015년 8월 16일,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는 중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고속도로가 막혀 차선이 하나뿐인 국도를 탔다. 정부군, 이슬람국가(IS) 등이 번갈아 수시로 하산 형제를 검문했다. 군인은 그들을 멈춰 세워 차에 내리게 해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타고 있던 택시를 총알이 뚫고 지나가기도 했다. 죽을 위기를 넘긴 직후, 하산은 겁에 질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옆자리의 쌍둥이 동생이 만류했다.

비자를 받은 하산 형제는 버스로 국경을 넘어 레바논 트리폴리로 갔다.

이어서 배를 타고 터키 메르신 항에 들어갔다. 16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다시 이스탄불에 갔다.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 그곳의 삼촌 집에서 2주간 머물렀다.

이후 상하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9월 12일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시리아
Aleppo
레바논
Tripoli
터키
Mersin
중국
Shanghai
한국
Incheon

공항에 도착한 하산은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인천공항 지하 1층에서 12일 동안 난민인정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심사 당시 분위기는 좋았고, 아랍어 통역도 비교적 잘 이루어졌다고 하산은 회상했다. 햄버거, 물 등의 식량이 주어져 끼니를 해결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통화를 할 수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없어 불편했다. 그저 기다렸다.

긴 기다림 끝에 입국허가를 받았다. 먼저 충북 음성에 정착한 형의 시리아인 친구가 인천공항에 하산과 동생을 마중 나왔다. 하산과 쌍둥이 동생, 그리고 먼저 한국에 온 형은 충북 음성군 대소면에 방을 구해 함께 살았다.

비자

난민 신청 6개월 만에 하산은 ‘난민 불인정’ 통보를 받았다. 대신 난민 불인정자 중 인도적 체류 허가자에게 주어지는 G-1-6 비자를 받았다. 이는 건설업을 포함한 단순노무직에 종사할 수 있는 비자다. 하산은 형, 동생과 함께 택배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택배 상·하차작업과 분류작업을 했다.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주 6회 일했다. 19살의 하산에게는 고된 일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월 180만 원 정도를 받았다. 일한 시간에 비해 급여가 적었다. 말도 통하지 않아 직원의 냉대와 무시를 겪었다. 그래도 하산은 성실했다. 지난 8월 말까지 입국 후 7년간 쉬지 않고 일했다. 회사에서도 하산의 꾸준함을 인정했다. 퇴사 직전에는 월 400만 원을 받았다. 하산은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자격으로 보험료도 냈다. G-1-6 비자를 소지하면 지역 또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그래도 비자 연장을 위한 갱신이 필요하다. 하산은 1년에 한 번씩 비자를 연장해야만 한다. 관할지역인 청주 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서 갱신한다. 그의 외국인등록증 뒷면에 1년 간격의 갱신 일자가 기록돼있다. 7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하산은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를 외부인으로 규정한다. 하산은 부모와 여동생이 있는 시리아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난민 인정자에게 주는 F-2 비자를 받아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

한국
하산은 형, 동생과 함께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고국을 떠나왔지만, 의지할 수 있는 형제가 있었다. 그래도 가족과 고향이 그립다. 2016년에는 공습으로 아버지의 원단 공장이 폭격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멀리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하산은 요즘도 엄마와 여동생과 하루 한 번씩 영상통화를 한다.

하산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충북 음성의 외국인도움센터가 큰 역할을 했다. 음성은 국내에서 지역 인구 대비 외국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하산은 외국인도움센터로부터 한국 생활 전반에 대한 안내와 조언을 받았다. 매주 토요일 한국어 공부를 했고 한국어능력시험(TOPIK) 3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음성 외국인자율방범대 활동을 했고, 지역의 독거노인을 찾아가 집 청소를 도왔다.

하산은 한국정착 후 꾸준히 한국어 공부를 했다. 엄마에 대한 애착이 컸던 하산의 한국어 책에는 ‘몸이 아플 때 엄마가 보고싶어요.’라는 문장이 손글씨로 적혀있다.

경제생활의 요령과 비법도 센터에서 익혔다. 하산은 월급의 절반을 고향의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보내고 나머지를 매달 저축해 돈을 모았다. 하산 삼 형제는 세 차례의 이사 끝에 월세에서 전세로 옮겼다. 올해 1월부터 현재의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하산은 자동차 수리에 관심이 많다. 인천 자동차 공장에서 수리 일을 하며 부수입을 벌기도 했다. 언젠가 자동차 수리와 관련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하산의 꿈이다.

지난 9월에는 잠시나마 가족을 만나려고 이집트 카이로에 갔다. 시리아가 아닌 타국에 가서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어렸던 동생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어 하산은 기뻤다. 그러나 하산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한 달이었다. 하산은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란다.

팩트체크
젊고 건강한 남자 난민들은 입대를 거부하고 도망친 가짜 난민이다? ‘거짓’

2018년 유럽연합 통계국인 유로스태트에 따르면, 유럽연합 28개 회원국을 통틀어 난민 지위를 신청한 58만 명 가운데 79%가 35세 미만의 청년이었다.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이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17년 기준, 국내 체류 중인 시리아인은 1,353명인데, 대부분이 난민인 이들 가운데 73%에 달하는 983명이 남성이었다. 특히 젊은 청년 가운데는 아사드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징집을 피해 온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젊고 건강한 남성 난민신청자들은 고국에서 인권침해와 중대한 위협을 당할 가능성도 크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건강하고 젊은 남성이 먼저 가족 곁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젊은 남성이 난민으로 인정되면 그 나라에서 가족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젊은 남성이 육체노동으로 얻은 소득을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병역기피’가 나쁘다는 관념이 있어서, 징집을 피하려는 난민의 처지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내전 상황에서의 징집은 남북으로 분단하여 대치하는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 세계적 기준으로 보아, 부당한 징집을 피해 탈출한 젊은 남성도 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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