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사 마르마
방글라데시
정부 탄압에 맞선 소수 민족의 청년 아웅사

아웅사 마르마(Aungshapru Marma·41)는 방글라데시 소수 민족인 줌머(Jumma)인이다. 줌머인은 16세기 무렵부터 방글라데시 남동쪽인 치타공 산악지대에 정착했다. ‘줌머’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 종교를 가지고 있는 11개 민족의 공동체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불교를 믿는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아웅사는 줌머인 가운데 ‘마르마’ 부족 출신이다.

줌머인의 터전인 치타공 산악지대는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그 영토로 편입됐다. 이때부터 줌머인을 향한 탄압도 시작됐다. 줌머인은 고유의 정체성을 버리고 방글라데시 무슬림 다수 민족인 벵골족이 되라고 요구받아왔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치타공 지역에 군대를 동원해 줌머인을 학살하거나 고문하는 등 폭력적 탄압을 일삼았다.

2005년 4월 13일, 벵골인 군인과 경찰이 아웅사가 살고 있던 줌머인의 터전을 무단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랑가마티 지역에 살던 줌머인 10여 가구가 주택과 농가를 잃었다. 터전을 빼앗긴 주민들이 군에 항의했고, 다툼이 격화해 2명의 벵골인과 1명의 줌머인이 사망했다.

이후 아웅사를 비롯해 중앙 정부에 항의했던 줌머인 15명이 기소됐다. 당국에 체포되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아웅사는 승려로 위장해 고국을 빠져나왔다. 2006년 1월의 일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 마을은 안전하지 않다. 아웅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찰은 지난 9월과 10월에도 고국에 남아있는 아웅사 가족의 집에 들이닥쳤다.

밀림과 숲속 마을, 국경을 넘나들며 고국을 탈출한 그는 브로커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 인도로 향했다. 일주일간 인도에 머물다 스리랑카로 이동했다. 이후 10년이 넘게 그는 타국에서 생존을 위한 학업을 지속했다. ‘학생 비자’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탈출한 이후 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지냈지만, 죽을 게 뻔한 고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스리랑카 콜롬보 지역에서 1년 반을 머물렀다. 절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팔리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문화와 음식이 맞지 않았던 그는 2007년 태국으로 떠나 마하모컷 불교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불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하 쭐라롱껀 라자비다라야 대학에서 불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까지 취득한 이후 더 이상 학생 비자를 연장할 수 없었던 그는 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중국, 싱가폴 등 여러 선택지 가운데 어떤 나라로 갈 것인지 수없이 고민했다. 선택한 곳은 한국이었다. 이미 난민으로 정착해 사는 줌머인 연합인 ‘재한줌머인연대’가 한국에 있었다. 한국에 가면, 스리랑카와 태국에서는 느낄 수 없던 소속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웅사는 여행사를 통해 관광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다. 태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인 2014년, 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관광 비자를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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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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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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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2019년 5월 10일이었다. 관광객 신분으로 들어와 집을 구하기 전까지 김포에 있는 재한줌머인연대에서 머물렀다. 일주일이 흐른 뒤, 그는 인천 출입국외국인청에서 난민인정 신청 절차를 밟았다.

난민신청자 신분으로 그가 처음 얻게 된 비자는 G-1-5였다. 한국에 6개월만 머물 수 있는 임시 비자였다. 그는 입국한 이후 6개월에 한 번씩 체류자격을 갱신했다. 갱신 기준이 궁금했지만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난민 인정을 받기 전까지 임시 체류자격을 연장해왔다.

아웅사는 첫 번째 난민인정 심사를 3년 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언어 때문이다. 그는 영어나 벵골어보다는 모국어로 통역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소수민족인 줌머인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통역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줌머 언어로 심사받기를 포기했다. 지난 9월 5일, 벵골인 통역사와 함께 첫 난민 심사를 받았다. 아웅사는 고국의 신문 기사와 증거 자료를 모두 모아 제출했다. 심사는 약 6시간 동안 진행됐다. 한 달여 뒤인 10월 14일, 그는 ‘난민 불인정’을 통보받았다. 그가 진술한 내용을 믿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 정부가 밝힌 난민 불인정의 이유를 아웅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라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금방 죽임을 당할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저에게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느니, 한국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한국의 난민법은 난민불인정 결정 이후 30일 이내에 이의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의신청 절차를 밟은 아웅사는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
아웅사는 천막 제조공장에서 일한다. 2019년 11월 무렵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그의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반이다. 오후 5시쯤 일을 마친다. 처음 3개월을 수습 기간으로 보냈다. 수습 기간에는 월 70만 원을 받았다. 이제는 월 280만 원까지 받을 때도 있다. 오래 일하다 보니 숙련된 기술도 생겼다. 다만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야외에서 작업하기가 어려워 일이 많지 않다.
“저는 한국이 좋습니다. 음식과 문화도 저에게 맞습니다. 이곳에서 정착해 미래를 설계하고 싶지만, 안타까운 점은 난민 인정을 못 받는 상황에서 제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겁니다.”

아웅사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얼마 전 병원에서 뇌종양 의심 진단을 받았다. 몇 달 전부터 귀통증과 청력 이상을 느낀 아웅사는 병원을 찾았다. 통증의 원인은 귀가 아닌 머리였다. 아웅사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서 병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하는데, 치료비용은 500만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G-1-5 비자로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아웅사로서는 막대한 치료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수술과 치료를 받는 동안, 난민 인정 재심사 과정을 제대로 밟을 수 있을지도 걱정된다.

팩트체크
난민이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를 망친다? ‘거짓’

한국에서 매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인원은 100명 남짓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3,737만 9,000여 명이다.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2021년까지의 난민 인정자 수인 1,163명이 차지하는 비율은 0.003%이다. 난민 인정자가 한국에서 취업하게 되더라도, 내국인 일자리가 유의미하게 감소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계절근로자 제도’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난민이 한국의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일자리를 얻은 난민이 경제적 활동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 가운데 일부를 세금으로 낸다면, 난민을 국가적 자산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복영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2018년에 발표한 <난민이 해외 수용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보면, 난민 수용이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한국처럼 출산율이 낮은 국가에서 난민이나 이주민이 저숙련 노동력의 부족을 대체할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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